세계한인민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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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 민족정체성과 화이부동(和易不同)

한국에 와서 가끔 주변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질문 중의 하나가 ‘중국의 조선족은 조국을 어디라고 생각하느냐’하는 질문이다. 그럴 때면 바로 답을 하기보다 질문하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게 된다.
결코 마땅한 대답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자의 표정에서 이미 “당신들은 중국을 조국이라고 하지 않는가?”라는 답안과 더불어 질문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세계화, 글로벌화시대에 민족 정체성에 대한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도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탈냉전과 글로벌화 및 국경의미의 퇴색 등에 따른 새로운 ‘민족주의’의 흥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이스라엘,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많은 재외동포를 보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해외 700만 동포의 민족 정체성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며 또 어떤 양상의 정체성을 바라야 할 것인가?
 
700만 재외동포가 서로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 분포되어 있듯이 재외동포의 민족정체성문제에 대한 인식 및 접근방법도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주의권에 살고 있는 중국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여느 지역의 재외동포에 비하여 심심찮게 화두의 중심에 오르곤 한다.
 
‘한국과 중국의 축구경기에서 어느 나라를 응원할 것인가’라는 논의에서부터 ‘박쥐론’에 이르기까지 대개는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회의적 혹은 부정적 논의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서로간의 불신과 대립을 초래하는 불씨로 작용한다.
 
700만의 재외동포, 서로 다른 시기 고국을 떠나 전 세계 곳곳에서 생활해온 그들의 민족정체성을 한국의 관점-‘한국민이면서도 한민족’이라는 똑같은 잣대로 가늠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재외동포는 다민족, 다문화의 각 나라에 정착해 살고 있기에 그들의 국적 소속, 거주국의 정책변화, 거주국에서의 법적지위 및 권리와 의무의 이행에 따라 그들의 민족정체성과 국가정체성 사이에 전혀 충돌하지 않는 하나의 회귀점(回歸點)을 찾을 수 있지만, 장기간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재외동포들의 민족정체성과 국가정체에는 한국식의 ‘국가=민족’이라는 간단한 등식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너무 많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가 그러하다. 광복 후 중국에서의 정착을 결심한 조선인은 자의든 타의든 무조건 중국국적을 가져야 했고 중국의 공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중국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의 성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그들은 중국의 민족정책하에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장백조선족자치현이라는 자치지역을 가지고 중국국민으로서의 정치, 경제, 문화적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였으며 타민족과 상호의존, 상호작용하면서 민족경계의 다면성(多面性)과 민족정체성의 다중성(多重性)을 유지하게 되었다.
 
거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 행사는 당연히 의무의 이행을 전제로 한다. 한민족아류로서의 조선족이면서도 거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행사와 의무이행 및 그 속에서 배태되는 중국에 향한 국가정체성, 이와 같은 이중적인 정체성은 단일민족국가의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상호 모순되는, 혹은 이해하기 힘든 논리일지는 몰라도 복합민족국가에서 그 나라의 국적을 소유하고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고 있는 소수민족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정당한 논리이다.
 
그리고 해외동포의 민족정체성도 변화의 시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세대가 바뀌고 고국에서 분리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외동포의 민족정체성은 또 다른 변화의 양상을 보이기 마련이다.

중국 조선족의 경우, 이주 1~2세대들은 비록 중국에 정착하였지만 그들에게는 한반도에 대한 뿌리의식, 한반도와의 혈통적인 관계가 고스란히 유지되어 있었으며 한반도는 그들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이고 조국이었다. 그들에게 조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선택의 여지없이 한국(조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후 중국에서 태어나고 중국식 교육을 받고 자란 ‘붉은기 세대’들, 특히 개혁개방 후 태어난 ‘80後’세대들은 그들만의 특정한 출생배경과 성장환경 등으로 그들에게서는 이주초기의 1~2세대들의 몸에 배어있던 한반도에 대한 혈연적인 정감과 일체감, 귀소본능 및 향수 같은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이나 조선은 그들에게 있어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국으로, 부모들의 해외노무로 가고 있는 나라로, 같은 언어와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같은 민족으로 기억되고 있다. 민족의 호칭에 있어서도 그들에게는 한민족보다 조선민족이 더 친근하다. 1~2세대들의 민족정체성이 혈통과 모국의식에 기초하였다면 3~4세대의 민족정체성은 문화적인 유사성의 인식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거주국의 주류문화를 대하는 태도 및 거주국과의 의존관계도 전 세대에 비하여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농경경제를 바탕으로 한 봉폐된 사회에서는 자연적인 집거지를 중심으로 동북3성이라는 한정된 지역 내에서 한족문화와 담을 쌓고 살아도 그 생존이 충분히 가능했지만 오늘날 중국의 개혁개방과 글로벌화의 추세에서 조선족차세대들의 활동반경은 기존의 동북3성을 벗어나 중국의 주류문화권 더 나아가 세계로 폭을 넓히지 않을 수 없다.
 
어릴 때부터 한족학교를 선택하는 것, 스스로 주류문화에 기울여지는 것, 중국과의 연대관계를 중시하는 것, 중국을 조국이라 생각하는 것, 어쩌면 삶의 뿌리를 중국에 내려야 할 젊은 세대들의 당연한 선택이고 귀결이기도 하다. 중국의 ‘조국’이라는 용어해석은 ‘조상들이 살아온 나라’, ‘자기의 나라’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기에 중국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는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정체성에 전혀 충돌되지 않는다(물론 고국과 거주국의 관계가 원활하게 유지되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얘기다). 즉 중국을 조국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결코 자신의 뿌리와 민족정체성을 버리거나 망각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중국을 조국으로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부모세대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민족공동체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과 자긍이 있다. 주류문화의 포위권 속에서도 의연히 조선족학교에서 말과 글을 배우고 있으며 설사 문화와 풍속을 잃었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조선족임을 머리에 각인하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조선족이라는 신분에 당당하고 떳떳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민족성분을 속이는 또한 속일 수밖에 없는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재외동포와는 퍽 대조적이다.
 
2008년 중국의 중앙텔레비젼방송국(CCTV) 최고의 오디션프로그램에서 연변의 김미아 양이 민족복장인 한복을 차려입고 민족고유의 아리랑을 불러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하는 사례에서도 젊은 세대들의 몸에 배어있는 민족의 혼을 느낄 수 있다. 주류를 쫓는다하여 결코 자기의 것을 잃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재외동포들이 자신을 키우고 민족정체성을 지키는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같은 민족의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이식된 후의 성장토양, 환경 및 자체의 자양분섭취차이에 따라 재외동포의 민족정체성은 복합성과 다양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한국민=한민족’이라는 사고방식은 한국이나 한국국적을 소유하고 있는 재외동포들의 경우 그 해석이 가능하지만 거주국의 국적을 갖고 있고 거주국에서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고 있는 재외동포에게 있어서 오히려 허다한 불신과 오해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이런 오해와 불신은 한민족공동체 및 고국에 대한 이심력(離心力)을 생성하는 불씨로 작용할 수 있다. 해외거주 한 세기반이라는 긴 여정의 변화를 감안할 때 중국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접근도 ‘한민족=한국민’이라는 획일적이고 경직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한국민’이 아닌, 한민족의 아류로서의 접근과 이해 및 포용이 필요할 것이다.
 
중국에는 ‘화이부동’이라는 말이 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화합을 이룸을 뜻하는 말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다문화, 다민족, 소통, 화합 등 단어들이 심심찮게 매스컴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타민족 타문화에 대한 존중과 이해도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 이해 및 상호 간의 신뢰구축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잣대로 재듯이 똑같은 민족정체성보다 서로 다른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마음가짐과 자세, 그것이야말로 정녕 한민족공동체의 저력을 키우는 지름길이 아닐까?…
 
출처 / 세계한인신문 www.ok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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